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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상하는 예술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초가집과 기와집이 대부분이었고, 읍내에 나가야 시멘트나 벽돌로 지은 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집 문 앞에 밭이 있었고, 연이어 마을 우물이 있었으며, 흙길을 50여 미터 걸으면, 넓은 논이 나오고 그 끝자락에 이르면 중량천 개울 둑이 높고 길게 뻗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봄이 오면, 아이들이랑 산에 가서 진달래를 꺽고, 그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봄이 오면 진달래를 꺽으러 다녔습니다. 진달래를 한 아름 안고 집에 오는 길은 마냥 행복했죠. 신기하게도 어느 한 주가 지나면 진달래가 모두 없어지고,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꽃을 피웠을 때는 그렇게 가여운 꽃잎을 하늘 거리며 멀리서도 눈에 들던 진달래가 꽃이 진 이후에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국어교과서에 나온 ‘진달래’라는 동시를 읽었는데, 그 시는 내 맘을 온전히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수줍어 수줍어서 다 못핀 연분홍이

부끄러 부끄러 바위 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새라 고대지고 말더라.

 

어린 나이에 이렇게 글이 쓰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만난 국어학자는 좋은 문장을 보면 몸에 전율을 느낀다고 합니다. 유명한 시인인 릴케는 어느 젊은이가 시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쓸 수 있는지 가르침을 묻자, 시를 안 쓰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 시가 쓰여진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표현하려는 감정과 욕구가 축적되고 폭발할 지경에 이르면, 멋진 작품이 나오는가 봅니다.

20여년 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상파 화가인 모네전을 가족과 함께 갔습니다. 그때 해설을 하시는 분의 이야기는 또 다른 놀라움이었습니다. 모네는 빛의 색을 표현하기 위하여 색을 섞고 덧칠을 반복하는 작업을 267번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색을 드러내기 위한 집념이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우리가 보는 하늘은 그냥 푸른 색이 아니고, 어느 크레용도 눈으로 보는 하늘 색을 갖지 않는데, 눈에 보이는 하늘색, 물색을 표현하려 애쓰는 모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여행을 가면, 방문하는 도시의 미술관에 가곤 합니다.

저는 가방 끈이 긴 사람이지만, 지금껏 내가 쓴 그림이나 글씨가 교실 뒤에 붙여진 적이 한 번도 없는 소위 ‘똥손’을 가졌습니다. 악기도 다룰 줄 모르고, 노래를 하면 음정이 곧잘 틀리고, 한번 들은 음을 똑 같이 반복하질 못하는 음치입니다. 그럼에도 음악을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매일 클래식 음악을 듣습니다. 미술관에서 판매하는 모네 그림도 집안에 걸어놓고, 르느와르전에 가서 조그만 그림을 사와 집안에 걸어 두고 봅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활동을 못하지만, 노래를 부르고 싶어 성가대에 가입해서 합창을 하고, 발성을 배우고, 단전에 힘을 모으고 두성(頭聲)을 내어 곱고 높은 소리를 시도합니다. 과거에는 음이 높아서 부를 수 없었던 가곡을 부를 수 있다는 경험을 하였을 때 행복했습니다. 음정 이탈은 여전하지만, 연습으로 음정을 외우면, 남에게 피해를 안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학과 음악,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듣고 배운 것을 되돌아 보니,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 더 많이 감상을 하게 됩니다. 또한 노래를 하고 싶은 욕구가 나를 성가대로 이끌고, 소리를 내는 경험을 하면서, 사람이 욕구를 표현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대학생때 에릭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그 동안 모호한 개념으로 대학가에 유포되던 자아실현의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했는데, 저자의 정의에 의하면 자신의 지적, 정서적, 심동적 능력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아실현이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렇게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를 원하던 사람들이 자유을 쟁취한 이후에는 스스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누군가의 보호를 찾아서, 권력의 그늘 아래로 도피하는 행동을 반복하는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아실현을 하는 것입니다.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은 권력과 명예, 부에 구차하게 기대어 안정과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스스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적, 정서적, 심동적 욕구를 외적으로 표현합니다. 즉, 살아있다는 것은 무언가 활력을 갖는 것이며, 그 활력이란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외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으되 죽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단법인 한국문화예술가협회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욕구를 표현하는 회원들의 작품을 보면, 참으로 멋진 분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올림픽의 체조경기를 볼 때 어린 선수들이 최고의 동작을 연출하려고 몰입하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예술의 경지로 표현하는 분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삶의 활력을 잃을 때, 외롭고 슬플 때, 기쁠 때, 설레일 때 이를 표현하십시오. 회원 여러분의 작품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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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진

군산간호대학교 총장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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