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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시대의 시뮬라크르와 예술가-되기

 

손원영 (서울기독대학교 교수)

 

20세기 초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이란 글을 통해 사진과 영화로 표상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예술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독창적인 창작물로써, 작가의 창조성과 천재성, 그리고 영원한 가치 등이 작품 속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하였다. 벤야민은 그것을 일컬어 ‘아우라’(aura)라고 말하였다. 말하자면 아우라는 예술작품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개성 같은 것으로 일종의 ‘후광’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진과 영화가 등장하여 예술작품은 대량으로 복제되고 재생산되면서, 그 작품 속에 고유하게 간직되어온 아우라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예술작품이 갖고 있던 ‘제의적(祭儀적) 가치’는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에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돕는 ‘전시적(展示的) 가치’만이 남게 되었다. 벤야민은 이것을 일컬어 현대예술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과거의 예술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던 일종의 ‘미메시스’(mimesis)이다. 이것은 외부세계에 대한 ‘재현’(再現) 내지 ‘모방’(模倣)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메시스로서의 예술은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모방이거나 혹은 우리 눈에 펼쳐진 외부세계에 대한 모방이든지 간에 본래 ‘원본’이 있다고 전제하고, 그 원본을 재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원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연히 작품의 고유한 개성으로써 후광과 같은 ‘아우라’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우라를 갖고 있는 원본은 언제가 가장 근원적인 미적 권위를 가지면서 복사물에게 존재의 가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원본과 복사본 사이에는 엄격한 수직적 위계의 질서가 존재한다. 마치 판화에서 아우라를 갖고 있는 원본이 존재하고, 또 그 원본에 가깝게 거슬러 올라갈수록 가격이 비싸지듯이 말이다.

그런데 복제기술로 표현되는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이 발전하면서 그러한 아우라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큰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파생시킨다. 이것을 일찍이 미셀 푸코는 ‘유사성’(resemblance)과 ‘상사성’(similitude)의 원리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유사성이란 원본을 전제하는 한에서 그 원본과의 가까움을 말하고, 반면에 상사성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고 각 존재들 사이의 같음과 다름(혹은 차이)이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현대예술에서 같음과 다름만이 존재하는 상사성의 관계는 곧 사회적 관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앤디 워홀의 유명한 작품인 <메릴린 먼로 시리즈>는 실제 모델을 모사한 사본이 아니라 애초부터 복제품을 조금씩 다르게 반복한 복사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원본(메릴린 먼로)과의 수직적 유사성이 아니라 각 사물들 사이의 수평적인 상사성 내지 곧 동일성과 차이를 잘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기술복제시대의 현대예술의 특징으로 원본과 아우라의 사라짐, 미메시스의 비절대성, 그리고 그에 따른 복사물 사이의 상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한마디로 미학사전의 용어를 빌리면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하며,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핵심적인 철학사상이기도 하다. 어쨌튼 시뮬라크르는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요,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이론을 뜻한다.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이론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특히 예술을 향유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시뮬라크르는 전통적인 예술관에 큰 전복적인 뒤집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즉 전통적인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후광과 같은 오리지널이었지만, 시뮬라크르적 사유에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은 그러한 위계적 유사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움은 결코 누구의 독점물이 아니며, 그 대신에 누구든지 각자의 상상력에 의해 끝없이 복사되는 상사적 복제물일 뿐이다. 말하자면, 누구든지 당당히 예술가-되기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과연 나는 그런 예술가-되기에 기꺼이 동참하기 위해 용기있게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의 빈곤을 탓하며 가까운 갤러리에 가는 발걸음조차 포기할 것인가이다.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인가? 바리기는 전자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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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원영​

신학 박사(연세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교수
(사)한국문화예술가협회 자문위원 
(사) 한국영성예술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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