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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고중락(苦中樂), 고통을 넘어 즐거워하라 
-불교식 사유의 한 방편-

                                                   

   인생은 누구나 즐거움을 원한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오히려 즐거운 날보다 고통스러운 날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진단은 오늘날뿐 아니라, 2500여 년 전 인도의 석가도 그랬다.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고통’(苦)이라는 시각에서 출발했다. 그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6년간의 고행 끝에,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 얻었다. 그것이 ‘연기(緣起)’라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이론이었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발생한다는 것,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나(我)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존재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입자들의 우연한 혹은 필연적인 만남의 결과였다. 이러한 연기적 세계관을 획득하고 보니, 일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이 없는 제법무아(諸法無我)요, 그에 따른 일체의 행실이 무상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공(空)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터득한 열반적정(涅槃寂靜)의 해탈 이론이 나온다. 이 모든 과정은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시작되는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로 압축된다.  


   여기서 불교 사상의 교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불교 사상의 기본적인 상식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다만 고통을 대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석가의 탁견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고통 극복의 대안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문제는 일체의 고통의 근원이라고 보는 무지(無知)를 벗어나고, 집착을 넘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으면 해탈까지다. 해탈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어떻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무지와 집착을 벗어날 수 있을까? 무지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삶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삶의 본질이 어떠하다는 것인가? 불교식 사고에 따르면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집착(執着)형’ 무지가 그 중의 하나다. 따지고 보면 집착은 마음 작용의 문제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고 삶을 불안하게 하며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하는 대부분은 불필요한 집착에서 발생한다. 요즈음의 시대에 비추어보면, 코로나 위기, 부동산 폭등, 청년실업 증가, 빈부격차의 심화, 기후 위기,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이념의 소모적 논쟁, 일일이 열거 할 수 없는 갈등의 요소들이 많다. 이들을 크게 분류해 보면, 경제적 위기, 건강의 위기, 정치적 위기 등이다. 상대적 빈곤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육체적 고통,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갈등,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싼 온갖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문제는 그 모든 스트레스의 요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석가와 같은 성현들의 해답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당면한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여기서 다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로 잘 알려진 원효를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는 『대승기신론소』를 저술하여 ‘한 마음(一心)’의 세계로 빚어지는 ‘두 개의 문(二門)’을 잘 풀이하고 있다. 이른바 두 개의 문은 참의 세계(眞諦)와 세속적 세계(俗諦)다. 이를 다른 말로 풀면 공(空)과 색(色)의 세계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즉시색’이라 했듯이, 우리는 현실세계의 물리적 ‘색(色)’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다만 물질세계이건 권력이든 모든 것이 ‘공(空)’함을 안다면, 집착에서 빚어지는 스트레스와 고통에서 멀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안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앎과 실천은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수행이 필요하다. 이 수행의 부분에 대해 조금 더 말한다면, 나는 ‘고중락(苦中樂)’을 말하고 싶다. “고통 중에도 즐거워하라”는 뜻이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은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정신적인 고통의 문제는 마음 씀의 문제다. 안빈낙도(安貧樂道)가 한 사례다. 공자의 수제자 안회가 그랬다. 가난해도 즐거움을 잃지 말 것이며, 갈등과 분쟁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말아야 할 일이다. 


   행복은 욕망의 추구에서 온다기보다는 오히려 욕망을 줄이는 허심(虛心)의 과정에서 온다. 욕망을 줄이는 것은 소박한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노자가 그래서 ‘통나무(樸)’ 비유를 자주 말했던 것이다. 위기와 갈등의 시대, 상대적 빈곤은 물론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을 말해보자면, 고통 중에도 즐거움을 잃지 말 것이며, 오히려 고통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고통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공통된 요인은 ‘욕망 줄이기’이다. 욕망 줄이기와 행복은 반비례 한다. 욕망을 줄이는 것은 사회적 낙오가 아니다. 오히려 내면의 충실함이다. 진정한 마음의 부자가 되는 길, 고통 그것을 빈 눈(虛目)으로 달게 받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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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권

동양철학자

비교종교학 박사

사)한국문화예술가협회 이사​

코리안아쉬람 대표

​열린서원 대표